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문단 편집) ==== 사산 왕조의 배신과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역병]] ==== [youtube(crxIVBxfg9Q)] 540년 ~ 542년간의 기간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에 있어 가장 바쁘고도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사산 왕조]]가 조약을 깨며 시리아를 침공, 안티오키아를 유린하였고, 전염병이 창궐하여 제국 전역에 큰 타격을 입히고 황제 본인까지 사경을 헤메야 했으며, 벨리사리우스가 시리아를 방어하러 이탈리아를 떠나있는 동안 동고트 왕국은 토틸라의 지휘로 부흥에 성공하였다. 게다가 속국이던 라지카 왕국이 이란 진영에 가담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지금까지 쌓아온 유스티니아누스의 업적이 무너져 내리는 듯 하였다. 사산 제국의 샤한샤 [[호스로 1세]]가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게 된 계기는 확실치 않지만 크게 두 계기가 있었다. 우선 539년에 동고트 국왕 비티게스가 이란으로 파견한 사절단은 유스티니아누스가 전 세계를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두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하였고, 서방의 전쟁이 끝나자마자 벨리사리우스와 대군을 동방으로 파견, 이란을 정복할 것이라고 주장하여 호스로 1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다음으로, 동로마 제국의 아랍 속국인 가산 왕국의 군주 자발라흐 5세가 이란의 아랍 속국 라흠 왕국을 침공, 약탈하였는데, 그 행위를 유스티니아누스가 묵인하였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 군제 개혁을 마친 호스로 1세가 라지카와 아르메니아 등의 지역을 노리고 있던 정황도 보인다. 그리하여 8년 만에 두 제국 간에 전쟁이 재개되었다. 540년, 호스로 1세는 벨리사리우스의 서방 원정을 틈타 협정을 깨며 시리아를 침공, 요새인 수라를 함락하였다. 이란 군대는 시리아 중부 일대를 대대적으로 약탈한 후 전쟁 준비가 미흡하였던 [[안티오키아]]를 함락, 시민 30만을 포로로 잡아갔다. 호스로 1세는 동로마 측의 반격이 있기 전에 약탈품과 함께 회군하였고, 그 여정에서도 시리아의 도시들로부터 몸값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호스로 1세에게 호재가 찾아왔으니, 바로 선조들의 숙원이자 콘스탄티노플 공략의 실마리인 흑해 진출의 균형추를 쥐고 있는 라지카 왕국의 군주가 보낸 반로마 항쟁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는 밀서가 크테시폰에 도달한 것이다. 541년 말에 이란 군대는 라지카를 점령하였고 이는 동로마 측에 큰 손실이 되었다. 다만 이란 역시 라지카를 직접 지배하며 종교적 탄압을 가하였고, 548년에 동로마의 도움을 받은 반페르시아 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파일:38b35485580ecbf8f5102193e6dc3526.jpg]] 541~542년의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나일 삼각주 동쪽의 항구인 펠루시움에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수도의 식량 공급원인 이집트의 곡물이 선박을 통해 콘스탄티노플로 운송되면서 보균자인 쥐가 퍼져나갔다. 따라서 역병은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지중해의 항구들을 중심으로 이란까지 퍼져 추정으로 '''2천만 이상'''이 사망하였다. 당시 세계 인구의 10% 이상이 사망한 것이다. 프로코피우스의 저술에 의하면 역병이 극에 달할 시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매일 수천 명씩 죽어나갔다고 한다. 원로원 의원 등 상류층도 많이 죽어서, 가문이 통째로 날아간 귀족 가문도 제법 있었다. 이 혼란상을 틈타서, 꾀가 많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남은 원로원 의원들의 재산을 몰수했다고 한다. 역병은 제국의 산업 기반인 농민과 상인의 수와 납세자의 수를 현저히 감소시켰고, 따라서 제국은 재정 적자에 시달리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특별세를 부과하며 위기를 타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면서 군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이 틈을 노린 것이 사산 왕조, 그리고 동고트 왕국이었다. 한편, 시리아 일대가 사산 제국에게 점령당하자 541년 말에 동부 전선에 복귀한 벨리사리우스는 나바데스가 이끈 사산 왕조 군대를 격파하고 [[니시비스]]를 포위하였으나 수비대의 저항과 요새화된 높은 성벽에 막혀 함락에는 실패하였다. 대신 그는 시사우라논이라는 작은 요새를 점령하는 데에 만족하였고, 1200명의 별동대를 파견하여 메소포타미아 중북부의 [[아시리아]] 일대를 약탈하게 하였다. 그들은 많은 약탈품과 함께 복귀하였다.(542년) 한편, 벨리사리우스는 협상을 위해 동로마 진영을 방문한 페르시아인 아바다네스 앞에 다민족 병사들(트라키아, 일리리아, 고트, 반달, 아랍, 헤룰리, 훈족 등)이 무기를 든 채로 여유로운 모습으로 있게 하여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아바나데스는 호스로 1세에게 돌어가서 최대한 빨리 떠나라고 충고하였다. 자신이 만난 장군은 남자답고, 그 누구보다도 지혜로우며, 그가 거느린 병사들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 >ㅡ 프로코피우스의 묘사 사신의 보고에 호스로 1세는 시리아에 주둔하던 군대에 회군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벨리사리우스는 오리엔트 일대에서 구원자로 칭송받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소리높여 벨리사리우스를 찬양했다. 그는 일찍이 겔리메르나 비티게스를 사로잡아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왔을 때보다도 이번 일에 더 큰 자부심을 느낀 듯했다. 하지만 벨리사리우스는 모함을 받아 542년 말에 관직을 박탈당하였고 따라서 사산 제국군은 평화로이 퇴각할 수 있었다. 벨리사리우스는 544년 봄이 되어서야 총사령관(Comes Sacri Stabuli)이 되어 복귀하고 이탈리아로 파견된다. 한편, 벨리사리우스의 후임으로 부임한 마르티누스는 아르메니아에서 일어난 반이란 봉기를 도왔으나 페르시아 군에게 대패하였다. 이후 한동안 아르메니아 일대를 재정비하며 시간을 소비한 호스로 1세는 544년에 벨리사리우스가 이탈리아 전선에 복귀하자 대장군 주라크[* 카바드 1세에 이어 호스로 1세를 섬겨온 노장. 일명 아자레테스(Azarethes)]에게 군대를 주어 안티오키아의 쇠퇴 이후 시리아 일대의 중심도시가 된 [[에데사]]를 포위하였다. 에데사의 수비대는 수성에 성공하였으나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5 센테나리아의 금을 바치며 포위에서 풀렸다. 545년에 동로마 측이 연공을 바친다는 조건하에 5년 기한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548년에 라지카에서 일어난 반이란 봉기에 동로마 측이 군대를 파병하며 깨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